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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oul’ of Bojagi

 

 

 

장동광

미술비평, 독립큐레이터

 

 

 

심리(心理)의 해저(海底)에서 길어 올린 원형의식(原型意識)의 피막(皮膜)들

왕경애의 작품이 지향하고 있는 개념적 지표는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의 ‘원형(Archetype)’ 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원형이론을 작품의 조형적 토대로 받아들이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에서 자주 나타나는 구멍(hole)은 일종의 모태적 공간으로서 여성성을 의미한다. 생명의 근원이자 인생의 욕망을 상징하는 이 모태적 공간은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가 말한 바 있는 일종의 자궁공간이자 귀소(歸巢)본능을 자극하는 상징적 도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여성성을 상징하는 음적(陰的)공간은 꽃잎, 식물의 덩쿨, 새의 깃털 등과 같은 구상적 도상들에 둘러싸이면서 남성적 양적(陽的)공간과 충돌한다. 다시 말하자면 바탕으로서 여성성은 하나의 땅과 같은 의미로서 음기(陰氣)라면 그 위를 둘러싼 겹의 실상들은 하나의 세상으로서 양기(陽氣)의 숨결로 파악해 볼 수 있다.

 

이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관계성은 왕경애에 있어서는 중요한 조형적 뼈대로 작용하고 있다. 정형성과 비정형성, 유기적인 선과 기하학적 형태의 대비, 이면(裏面)과 표면(表面)의 대치, 요철(凹凸)의 구성 등은 단지 대립적 구조를 드러내는 표상(表象)들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전의 퀼트작품이 그러했듯이 대립과 충돌을 넘어선 새로운 화해의 영토를 지향한다. 이 변증법적 질서는 왕경애가 추구하는 조형개념을 함축하는 철학적 사유이기도 하다. 즉 불교에서 회자되는 “일심의 근본으로 돌아가다(歸一心源)”는 법어는 순환론적 사유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조형적 지향점을 대변하는 하나의 깃발과 같다. 그녀는 하나의 전체를 꿈꾸며 작은 개체들을 조합하고, 실상과 허상을 대비시키고, 심리의 저변을 유영하는 무의식의 단상들을 의식의 표층으로 끌어내는 시도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왕경애의 작품에서 ‘그림자’의 문제 역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비평적 분석의 요소이다. 이번 근작들에서 우리는 왕경애가 섬유의 특성인 투과성과 유연성에 중요한 조형적 의미를 부과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그녀가 주목하는 그림자의 문제가 물리적 존재로서 의미와 관념적 추상개념을 동시에 획득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작품이 허공에 설치될 때, 조명이나 빛에 의해 필연적인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여기서 실상과 허상의 관계성이 긴밀히 조우하면서 새로운 환영적 공간(Illusional space)이 우리의 시야를 적시게 되는 것이다. 이 환영적 공간은 섬유미술로서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빙점(氷點)이기도 하다. 섬유직물 만이 지닌 투과성으로 인해 물리적 그림자를 드리움으로써 실상과 허상이 새로운 조형적 의미를 창출하게 되고, 나아가 왕경애의 다층적 레이어(layer)를 지닌 직물의 겹구조는 시간성의 개념까지 담보하게 된다. 바람에 흔들리거나, 외부 환경의 변화에 의한 가변성을 지님으로써 그녀의 이러한 유형의 작품들을 미완결적 구조(Incomplete Structure)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왕경애가 주목하는 것은 이 물리적 그림자의 가변성 보다는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내재하는 사악한 면, 부도덕성과 공격성, 잔인성 등의 원형에 관한 의식으로서 그림자의 본질을 천착하는 것에 있다. 의식의 거울 혹은 무의식의 그림자로서 그녀의 직물회화는 인간의 원죄의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미학적 껍질들인 것이다. 왕경애는 이 인간 혹은 자신의 내면 속에 잠재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표출함으로써 비로소 정화의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녀의 근작들은 하나의 철학적 수행의 편린들이며, 인간의 원초적 해저(海底)에 부유하는 욕망의 해초들을 형태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왕경애는 하나의 세계, 그 귀일심원(歸一心源)의 해저에서 길어 올린 푸른 사유들을 우리들에게 들려주려 하고 있다. 그 푸른 사유의 다른 이름은 자아(The Self)가 아닐까 싶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들 간의 통일, 조화, 전체성을 향한 그녀의 직물회화, 섬유오브제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연의 호흡에 실려 직조되어 왔다. 망각의 신화, 무의식의 심연 속에서 깊게 가라 앉아있는 인간 심리의 원형을 찾기 위한 왕경애의 이 긴 항해의 끝은 어디일까. 사실 그녀가 새로 쓰고자 하는 예술적 신화는 섬유미술과 현대미술이 경계없이 공존하는 예술의 시원(始原)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시원의 차원을 넘어서 섬유미술만이 표현해 낼 수 있는 미학적 기념비가 황금처럼 빛나는 새로운 예술의 땅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번 왕경애의 근작들을 대하면서, 그녀의 변화무쌍한 예술적 항해에 동행하기 위해서는 나의 고루한 비평적 시각의 배를 다시 개수(改修)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The ‘Seoul’ of Bojagi_ KyungAe Wang

  Aug. 11 - Aug. 2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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