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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a Butterfly - 나비의 길"

 

박순영(미학)

 

 

빛의 그림자, 또는 그림자의 빛

 

일반적으로 회화는 색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로서 존재한다. 색에 의해서 선이 생기고 형태가 나타나고 빛이 표현된다. 이들은 그림자에 의해서 화면 안에 세계의 깊이를 구성한다. 하지만 인상주의로 접어들면서 그림자는 제거되었다. 왜냐하면 화면에서 환영을 발생시키는 것이 그림자의 유일한 기능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긍정성보다 부정성을 지시하고, 또한 허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림자는 색으로 대체되고 화면은 빛의 성질만을 띄게 된다. 이로써 회화는 색의 가치와 평면성이라는 매체적 속성은 확인했지만, 그림자가 사라지면서 화면의 형상들은 실체의 가치를 잃었다. 하지만, 그림자가 인위적인 측면에서 실체와 분리될 수 있다 하더라도 자연적인 측면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림자는 제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빛이 감각적인 세계와 함께 나타나는 한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자가 제거되던 시대나 전후에도 심연의 어둠이나, 사물의 무게를 추구하는 회화에서는 그림자의 존재는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빛과 그림자는 밝거나 어둡고, 따뜻하거나 차갑고, 날카롭거나 부드러운 느낌처럼, 여러 면에서 상반되지만, 비물질적이면서 감각적이고, 실체가 아니면서 실체를 드러나게 하고, 실체와 분리불가능성을 갖고 있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리고 서로를 규정하기 때문에 반드시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림자는 항상 부정적인 측면만을 담당했다. 빛과는 반대로, 몸에서 빠져나가는 듯이 있고 마치 지하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빛의 속성이 신성함을 지닌 이데아를 상징한다면, 후자는 악함을 지닌 죽음을 상징한다. 하지만 신이 그랬듯이 빛이 지닌 또 다른 속성은 파괴적이다. 눈을 멀게 하고, 날개를 불태운다. 즉 처벌하는 힘을 지녔다. 반면, 그림자의 또 다른 속성은 포용적이다. 땅에 가까운 그림자는 빛의 이면에서 실체를 지탱하면서 눈먼 자의 길을 안내하고, 재(灰)를 흡수한다. 이렇듯 이성의 편에서 비롯된 그림자의 부정성은 사실 감성의 편에서 보게 되면 그 반대의 속성이 강하다. 실제로 빛의 폭력성은 포용적인 그림자에 의해서만 감춰질 수 있다. 이성과 감성, 선과 악, 과거와 미래가 그렇듯이 빛과 그림자의 관계에도 역설이 존재한다. 샤르트르 대성당 안을 신성함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에 의해서이다. 우리가 여기서 성스러움을 느낀다면, 그 이유는 빛으로 여겼던 것이 사실상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빛의 그림자이자 색의 그림자이며, 그림자가 우리를 신성함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이러한 역설을 담당한다. 그림자를 지켜내는 작가는 물론이고, 빛을 표현하려는 작가에게도 마찬가지다.

 

“나의 작업은 빛을 캔버스위에 조사(照射, irradiate)하거나, 라이트 박스로 빛을 준비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유리를 자르고, 부수고 채색하고 굽거나, 목탄그림으로 빛을 가리면서 빛을 조형화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작업을 진행하다보면, 어느덧 빛이라는 출발점보다는 생각지 않았던 그림자 만들기에 빠져드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빛의 조형화를 위한 단계일 뿐이었지만,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매체로써 빛과 유리를 택한 내게 그림자는 빛과 공존하는 커다란 모순이다.”

 

작가가 고백하듯이 빛을 표현하고자 했던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림자를 표현하게 된다. 애초에 그가 빛을 의도했던 것은 개별적이고 소외되며 익명적인 것들에 빛의 속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빛은 능동적이고 긍정적이며 리듬적이어서 음악이고 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은 그림자와 공존하므로 비능동적이고 파괴적이어서 비긍정적이고 날카로워서 비리듬적이다. 따라서 빛을 표현하려고 하더라도 실제로 표현되는 것은 그림자가 된다. 작가가 의도했던 구원의 힘은 그림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가 마주치게 된 우연하고도 필연적인 방식은 감각적으로 소생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는 빛을 향해 다시 오르려는 그 감각의 노력을 느끼며, 되찾은 실재에서 오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는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다. 빛에서 그림자로의 전이는 작가가 자신의 표현을 수동성에 맡겼기 때문이다.

이제 그림자로서 드러난 세계는 거꾸로 영향을 미친다. 그림자는 음악에서의 피아노나 성대(聲帶), 시에서의 잉크에 묻어난 단어의 역할과 동일하게 화면에 수직으로 설치된 채색된 유리판에게 영향을 주고, 동시에 유리를 통과하기 전의 빛에게까지 영향을 준다. 그렇게 빛을 드러나게 하기 때문에 빛은 그림자를 통해서 완성된다. 이렇듯 포용적인 그림자의 속성에 의해서 유리판의 유연한 곡선은 고요한 산수가 되고, 서있는 인물은 포근한 안식을 얻으며, 거친 듯 표현된 달의 표면은 감성적인 빛을 발산한다. 이러한 현상은 라이트박스의 형상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화면 안쪽에 목탄으로 그려진 이미지들은 그림자가 되어 화면 밖으로 드러난다. 그림자는 유리판의 역할과 동일한 목탄에 영향을 주면서 양감을 지닌 나무가 되고, 연인이 되고, 고양이가 되고, 엠페도클레스의 신발이 된다. 그리고 전기가 변환된 최초의 빛은 물질적 가치를 지닌 흰색의 가치를 갖게 된다. 작품의 가장 중요한 물질적인 요소는 이렇듯 유리판이나 목탄은 그림자의 강요에 의해서 그림자-빛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필요한 의식을 치르고 있는 듯하다.

 

회화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표현들과 물질들, 그리고 기억들은 자신의 진정한 내용을 간직한 채로 드러난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형태들이 아니라, 그 속에 살아있는 힘들과 긴장들, 즉 에너지들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감성원의 작품은 빛의 속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지만, 빛은 오히려 외적인 형태로서 작용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빛의 화려함과 밝음을 보는 것보다, 빛을 신성하게 해주는 아늑함을 느끼길 바란다. 아늑함에서 음악적으로 발산되는 진동과 버려졌던 그림자의 진리를 떠올리면서.

 

 

 

 

조현아(조형예술학)

 

 

유리와 빛의 조응.  감성원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먼저 우리 눈에 와 닿는 것은 바로 이 둘의 어울림이 자아내는 실존과 부재의 효과인 듯하다. 그것은 아마도 이 두 매체에 내재한 부인할 수 없는 물질성, 상징성에 기인한 아우라에 의한 것이리라.

   

하지만 작가에게 이 두 재료는 작품이라는 무대 위에서 작가 자신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해내 줄 수 있는 노련한 배우로서 매번 초대되는 것일 뿐으로, 이번 작업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배역은 빛과 그림자, 실재와 이미지라는 두 대립항을 작가의 의도대로 능란히 표현해 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오늘날 우리들 삶의 많은 부분들에서 보여지는 극단과 모순을 진지하면서도 맑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눈을 대신하고 우리 관객들을 바로 그 시선속으로 초대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것이다.

 

전시비평 '그림자를 향한 시선' 중 발췌

 

"Via Butterfly/나비의 길"_ SungWon Kam

   Oct. 1 - Oct. 3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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