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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or…”

 

SunYoung Lee

Art Critic

 

차이와 반복.

 

고헌은 알루미늄 판을 캔버스로, 그라인더와 샌드페이퍼를 붓 삼아서 그림을 그린다. 아니 그린다기 보다는 새긴다. 그 깊이가 아주 얇아 표면을 긁적거린 것 같다. 이를 통해 브러쉬 워크에 해당할만한 질감을 만들어내고 그것은 외부의 조명을 받아 현란한 반사면들을 만든다. 이 반사면들은 변화무쌍한 표면 효과를 자아냄과 동시에, 구상적인 형태를 교란한다. 판 위에 얇게 새겨진 이미지가 갈아낸 표면 효과들로 대치되면서 시각적인 유희를 만들어낸다. 인상파들이 반짝이는 빛입자의 표면효과를 통해 대상을 해체한 것과 비교될 수 있다. 그의 작품에는 손, 발, 고뇌하는 사람 등의 구상적 이미지가 있지만, 그것은 재현과는 거리가 있다. 작가는 우선 중력을 받는, 형태가 서 있는 바탕을 제거한다. 가령 그의 작품에서 양복 입은 사람들은 알루미늄 사각면 상하좌우 모두를 지표면으로 삼아 움직이고 있다. 이 빈 공간은 단순한 허공이 아니라, 다수의 지지기반이 중첩된 무한한 장소가 된다.

 

고헌의 작품은 금속 표면을 갈아내는 반복되는 노동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차이를 통해 형상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동시대 철학의 주제인 ‘차이와 반복’이 나타난다. 들뢰즈는 그의 주저인 [차이와 반복]에서 현대예술은 가장 추상적인 성찰뿐 아니라, 실제적인 기법에서까지 차이와 반복의 주위를 맴돈다고 지적한다. 무의식, 언어, 예술 속에서 반복의 고유한 역량이 발견되고 있다. 들뢰즈에게 차이와 반복은 이전시대의 테마인 동일자와 부정적인 것, 동일성과 모순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모든 동일성들은 차이와 반복이라는 보다 심층적인 유희에 의한 광학적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화가에게 붓이 손의 일부이자, 손의 연장이 되어 그만의 싸인과도 같은 표면을 만들어내듯, 고헌의 손에 쥐어진 기구들은 기계적인 반복과는 무관하다. 이러한 기계적인 반복을 들뢰즈는 ‘물질적이고 헐벗은 반복’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같음의 반복은 외피이거나 겉봉투에 불과하다.

 

우리의 환경은 지극히 기계적이고 천편일률적인 반복들이 지배한다. 그러나 그 반복들로부터 끊임없이 어떤 작은 차이, 이형들을 추출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고헌은 작업을 통해서 기계적인 반복(같음의 반복)들에 숨어있는 반복의 보다 심층적인 구조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 통해 만들어내는 차이는 부단한 탈중심화와 발산의 운동을 보여준다. 고헌의 작품에서 반복은 재현을 허무는 형상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의 작품에서 그라인더나 샌드 페이퍼의 반복된 작업이 만들어 내는 형상은 빛에 의해 그 고유성을 끊임없이 침해당한다. 반복의 궁극적 요소는 계속되는 불일치에 있으며 재현의 동일성에 대립한다. 들뢰즈는 동일성의 우위가 재현의 세계를 정의한다고 말한다. 재현은 개념의 매개와 구성능력을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현대미술가는 차이를 표현하고자 하며, 이는 차이 나는 것들을 같음으로 환원하고 부정적인 것들로 만들어 버리는 재현의 형식들에서 벗어나야 가능한 일이다.

 

현대미술은 재현의 파산과 더불어 태어난다. 들뢰즈는 현대를 시뮬라크르, 곧 허상들의 세계라고 지적한다. 허상은 원형과 모사라는 이분법을 전복한다. 재현주의를 넘어서려 했던 추상미술조차도 이러한 이분법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다. 재현주의에 대한 전복적 사유는 오히려 형상을 끌어들임으로서 가능하다. 들뢰즈식의 담론에서 거론되는 미술가가 추상화가들이라기 보다는 베이컨이나 와홀같은 작가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헌의 작품에도 기반과 배경이라 할만한 것이 없는데, 그것은 현대미술이 재현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채택했던 기준인 평면성과는 차이가 있다. 추상미술에서 개념들은 매우 일관성 있고 정합적이었다. 그러나 고헌은 그러한 개념들을 만들면서 동시에 부순다. 그의 작품에서 형상들은 움직이고 있는 어떤 지평에서 언제나 탈중심화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부재의 장소처럼 위치를 바꾸고 위장하며 양상을 달리하고 언제나 새롭게 재창조되는 지금 여기를 의미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일종의 느림, 응결, 정지 등의 모습을 표현한다. 여기에서 더 이상 근원적인 것은 없다. 있는 것은 어떤 영원한 섬광뿐이다. 고헌의 작품에 나타나는 형상들은 대지 위에 정초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대지를 점유하거나 소유하지 않고 떠돈다. 그것들은 근거가 와해되어 있다. 들뢰즈는 근거와해라는 말을 매개되지 않는 바탕의 자유로 받아들인다. 고헌의 작품에서 무색 또는 단색조로 뒤덮인 표면들 위로 지나가는 선들은 유기적 재현의 표면적인 균형 아래 계속 움직이고 있는 바탕을 증언한다. 그리하여 고헌의 작품에서 바탕 면들의 다양한 굴곡들은 형상들이 품어내는 기(氣)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이러한 원천적인 시공간에는 자유롭고 야생적인 혹을 길들여지지 않은 차이들의 다원주의가 있다.

 

고헌이 만들어내는 형상들은 작품은 표면을 파냄으로서 이루어진 산물이기 때문에 네거티브 이미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인간들은 가면을 쓴 것 같다. 번듯하게 차려입은 양복쟁이 신사들의 모습에서도 위장술같은 효과가 난다. 재현주의의 동일성을 극복하려는 현대예술 또는 현대철학이 채택한, 차이와 반복의 주제와 다시 연결시켜 해석한다면, 그것은 가면들이 가리키는 것은 다른 가면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반복되어야 할 최초의 항이란 없다. 가면이야말로 반복의 참된 주제이다. 반복은 재현이나 표상과 다르다. 반복되는 것은 재현될 수 없다. 다만 자신을 지시하는 것을 통해 지시되긴 하나, 이내 다시 가려질 뿐이다. 가면들의 뒤에는 여전히 가면들이 있고, 이러한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

 

“Some…or…”_ Koh Hon

    April 19 - May 3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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